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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6일 주북(駐北) 러시아대사 알렉산드르 마체고라가 향년 70세로 급사했다.마체고라 대사는 2014년 12월 26일부터 2025년 12월 6일까지 총 3998일,즉 11년 가까이 평양 주재 대사로 재임했다.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 주북 대사 가운데서도 가장 긴 재임 기간이다.지난 12월 10일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빈소를 찾아 조문할 정도였다.
'북조선 총독' 시트코프 초대 대사
하지만 북·러 양국 모두 마체고라 대사의 사인(死因)에 대해 이례적으로 함구하면서 도리어 의문이 증폭되는 모양새다.러시아 외교부 공문에서도 '급사(急死)'라는 표현만 나왔다.지난 11월 모스크바 귀국 직후 숨졌다는 전언이 있으나,자연사인지 비자연사인지는 러시아와 북한 어느 쪽에서도 확인해주지 않는다.
구(舊)소련 시절을 통틀어 제18대 주북 대사를 지낸 마체고라는 평양을 거쳐간 역대 대사 중에서도 서너 명 안에 드는 중량급 인물이다.1948년 북·소 수교 후 지금까지 수많은 대사들이 평양을 거쳐갔다.초대 주북 소련대사는 테렌티 시트코프였다.시트코프는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대표단장으로 임명돼 북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최고인민회의가 북한 초대 내각 구성을 승인하기도 전에,시트코프가 이를 자신의 일기에 적어둘 정도였다.
1949년 김일성과 박헌영이 남조선을 무력으로 '해방'하자는 구상을 처음 제안했을 때도,그들은 스탈린에게 직접 접근하지 않고 먼저 시트코프와 접촉했다.하지만 유엔군의 반격으로 평양까지 내주면서 시트코프는 3성 장군에서 2성으로 강등됐고 모스크바로 소환됐다.
'북조선 총독'으로 불린 시트코프 이후 그의 후임자들은 그런 권한을 전혀 부여받지 못했다.제2대 대사 라주바예프 소장 역시 직업군인이었다.6·25전쟁 시기 임명된 그는 공산권의 군사작전 전반을 감시했다.다만 1950년 11월 참전한 중공군은 라주바예프의 지휘 체계에 속하지 않았다.중국 측은 이미 그 무렵 "우리 의견은 다르다"고 말할 만큼 독자성을 보였다.
시트코프와 라주바예프에 이은 3대 대사 수즈달레프는 최초의 직업 외교관 출신 대사였다.수즈달레프가 대사로 임명되기 직전,북한 엘리트 간부 중 '소련파'였던 허가이는 김일성에게 규탄받은 직후 소련의 도움을 구했지만,소련은 이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다음 날 허가이가 사망했는데,자살 가능성이 유력하다.
이후 대사들도 북한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4대 대사 이바노프는 러시아 공화국 부총리급 직책을 지낸 고위간부였는데,1956년 '8월 종파 사건' 당시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고,결과적으로 그의 '무행위'는 김일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후 북한을 '진짜' 잃어버린 대사는 제5대 대사 푸자노프였다.당시 소련은 김일성 1인 지배가 '레닌주의 원칙'과 맞지 않는다며 당 중앙위원장 또는 수상 자리를 다른 간부에게 양보하라고 지시했다.하지만 푸자노프의 무능으로 김일성은 이를 사실상 무시했고,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았다.푸자노프는 이후 주아프가니스탄 대사로 재직하면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기여했는데,결과적으로 북한과 아프가니스탄 모두의 운명에 부정적 영향을 남겼다.
푸자노프의 후임자인 모스콥스키는 매우 솔직한 보고서로 유명했다."상대방이 요점을 흐리며 말만 늘어놓는 통에 한 시간을 낭비했다" 같은 문장을 거리낌 없이 적었다.이 같은 표현을 접한 소련 외교부 지도부가 웃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후 7대 대사 고르차코프는 재임 기간이 짧아 유의미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8대 대사 수다리코프는 북한으로 떠나기 전 소련 수상 코시긴으로부터 "문제적 친구들을 잃어버리지 마라"는 지시를 받고,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9대 대사 크리울린도 부임 직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소련 지도부에 남한과 수교 가능성 검토를 조심스레 제안하기도 했다.
10대 대사 슈브니코프는 역대 대사 중 최초로 조선어를 구사했다.1986년 여름 김일성이 쓰러졌을 때,포커 베팅 어플슈브니코프는 고르바초프에게 직접 연락해 의료진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보내기도 했다.11대 대사 바르토셰비치는 벨라루스 출신 간부였고,마지막 소련대사 캅토는 고르바초프의 정적으로 강경파 성향이 매우 강해 소련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낮았다.
우크라이나 출신 마체고라의 유산
1990년 소련이 대북 원조를 중단한 뒤 북·소,북·러 관계의 중요성은 급격히 떨어졌다.파데예프와 데니소프 대사는 한반도 학자였지만,역사에 남긴 영향은 크지 않았다.카를로프 대사 재임 중에는 평양에 사실상 외교관 전용 '정교회'가 문을 열었다.카를로프 본인은 2016년 튀르키예에서 이슬람국가(IS)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했다.
수히닌 대사는 한반도 전문가로,북한 자료를 열심히 연구한 인물이었다.북한의 '조선중앙연감'에는 러시아의 원격지인 칼리닌그라드주가 실수로 리투아니아 영토로 표기돼 있었는데,수히닌 대사 부임 직후 북측은 이를 수정했다.수히닌의 후임 티모닌은 러시아 외교부 기준으로도 극단적 기회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으며,외교관이라기보다 '집행관'에 더 가까운 인물로 평가됐다.
사망한 마체고라 대사가 임명된 2014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한 해였다.마체고라는 원래 러시아 외교부에서 반권위주의 온건파로 알려져 있었다.하지만 그해 2월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혁명' 직후 러시아군은 크름반도에 진주해 이를 병합하였다.그때부터 푸틴 정권은 매우 반서방적 노선을 내세웠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까지도 마체고라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북한 학생과 노동자들을 러시아에 가도록 주선했고,북한 주민들에게 식량 등 경제적 지원을 주도록 노력했다.코로나 시절 마체고라는 러시아 백신 '스푸트니크'를 북측에 무료제공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공식 행사에서도 마체고라의 '진면목'이 드러났다.북한의 리을설 원수가 러시아 메달을 받았을 때에 마체고라는 "그는 우리 소련군 88여단 출신"이라고 강조했다.북한 당국은 물론 김일성과 그의 동지들이 소련군(88여단)에 복무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마체고라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에도 사임하지 않았고,푸틴을 위해 대사직을 수행했다.이 시절에 북·러 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화됐다.양국 동맹 관계가 복원됐고,김정은은 러시아에 1만명 이상의 병사를 우크라이나 전선에 파병했다.북한이 제공한 포탄이 러시아의 전쟁 수행을 떠받쳤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마체고라 자신이 이 관계를 지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결국 자유주의자로 시작한 마체고라의 유산은 파괴된 우크라이나 도시와 수만 명의 희생자로 남았다.독재정권을 위해 복무를 선택한 자유주의자가 겪는 비극적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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