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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송역 어느 노포에서 예비 고1 아들과 함께한 주말 점심【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월의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주말 오후.경기도 고양시 삼송역 3번 출구 앞,화려한 프랜차이즈 간판과 높이 솟은 신축 건물들 사이로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 하나 서 있다.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로 투박하게 적힌 '고향 손 칼국수'.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되는 아들 녀석을 앞세우고 그 좁은 문턱을 향해 걷는다.훌쩍 커버린 아들의 등짝을 보며 문득 30여 년 전 나의 시간을 떠올린다.그리고 그 시간의 틈새를 메워줄 뜨거운 국물 한 그릇을 찾아,우리는 긴 줄의 꼬리를 문다.
기다림마저 맛이 되는 공간,노포의 원칙
가게 입구는 이미 만석이다.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분주하다.입구에 붙은 안내문들이 이 집의 성격을 대변한다.
"입구가 협소하오니 자리가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일요일은 쉽니다." 그리고 눈에 띄는 문구 하나."앞쪽 1인석에 2인 이용 시 자리 이동 불가입니다."
무뚝뚝해 보이지만,좁은 공간에서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한 끼를 대접하기 위한 노포만의 '엄격한 다정함'이다.영업시간은 11시부터 19시 55분까지.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주방의 열기를 바라보며 언 손을 녹였다.대기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짜증보다 기대감이 서려 있다.이 기다림 또한 음식의 맛을 돋우는 전초전임을 다들 아는 눈치다.
투박한 손끝에서 피어나는 '진짜'의 미학
15분 남짓 기다렸을까,비트코인드디어 가게 안으로 입성했다.자리에 앉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픈된 주방이다.아니,'주방'이라기보다 장인의 작업실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주방 안 풍경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희끗한 머리칼을 모자 속에 감춘 할머니 사장님은 쉴 새 없이 끓어오르는 육수 솥 앞에서 면을 삶아낸다.그 옆,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할아버지 사장님은 밀가루 반죽과 씨름 중이다.기계로 뽑아내는 매끈한 면발이 아니다.홍두깨로 밀고,접고,칼로 썰어내는 100% 수작업이다.'손칼국수' 간판의 '손' 자가 부끄럽지 않은 광경이다.
남편이 밀어낸 반죽을 아내가 삶아낸다.수십 년을 맞춰왔을 두 사람의 호흡은 마치 잘 짜인 안무 같다.거칠고 투박한 손놀림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찾아오는 이들을 먹이겠다는 정성,아니 '애환'이다.창밖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자욱한 수증기를 관통할 때,그 장면은 흡사 성스러운 의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멸치 육수,그 깊고 진한 위로
메뉴는 단출하다.칼국수와 수제비(오후 3시 이후 가능),그리고 콩국수.가격은 1만 원 내외다.우리는 칼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양 많이!"를 외치지 않아도 넉넉한 인심이 담겨 나온다.
이윽고 받아든 스테인리스 그릇.화려한 고명은 없다.숭덩숭덩 썬 애호박,송송 썬 대파,그리고 김 가루와 후추가 전부다.요즘 유행하는 바지락 칼국수나 닭칼국수처럼 건더기가 푸짐한 것도 아니다.하지만 국물을 한 숟가락 뜨는 순간,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진하다.멸치를 통째로 우려낸 듯한 묵직한 육수다.비릿함은 잡고 구수함만 남겼다.멸치 똥을 일일이 제거하고 푹 끓여낸 정성이 혀끝에 닿는다.울퉁불퉁 제각각인 면발은 입안에서 춤을 춘다.기계면처럼 매끄럽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씹을수록 밀가루의 고소함과 찰기가 느껴진다.
함께 나온 겉절이 김치는 또 어떤가.젓갈 향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칼국수의 심심함을 완벽하게 보완해주는 '마침표' 같은 존재다.아들은 "아빠,이거 진짜 맛있다"라며 연신 국물을 들이켠다.인스턴트와 자극적인 맛에 길든 요즘 아이의 입맛에도 이 '원초적인 구수함'은 통하나 보다.
80년대 발라드,비트코인그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기억
뜨거운 국물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보고 있자니,문득 귓가에 80년대 발라드 한 소절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하다.
그렇지만 문득 그대 떠오를 때면
이 마음은 아파 올 거야
그 누구나 세월가면 잊혀 지지만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양수경,비트코인'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중)
주방 솥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마치 빗물처럼,안개처럼 시야를 흐린다.김이 서린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거리의 풍경은 이문세의 노래를 소환한다.
이제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이문세,'광화문 연가' 중)
그리고 조덕배의 쓸한 목소리도 겹쳐진다.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지금도 난 기억합니다
사랑한단 말 못하고 애태우던 그 날들을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철 없었던 지난 날의 아름답던 그 밤들을
아직도 난 사랑합니다
(조덕배,비트코인'나의 옛날이야기' 중)
80년대,우리는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었다.학교 앞 분식집에서 먹던 찐빵과 만두,그리고 뜨거운 칼국수 한 그릇.주머니가 가벼워도 친구와 함께라면,연인과 함께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사랑'의 가사를 흥얼거리며,입김 호호 불어가며 나누던 그 음식들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위로'였다.
조정현의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를 들으며 가슴 시려 하던 청춘,성시경이 리메이크하기 전 김광석의 원곡으로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막연한 불안감을 달래던 날들.그때 우리 곁엔 항상 김 모락모락 나는 분식이 있었다.이곳 고향 손 칼국수의 맛은 그 시절 발라드와 닮았다.화려한 기교나 전자음 없이,오직 통기타와 목소리 하나로 승부하던 그 시절의 노래들처럼.멸치와 밀가루라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로 가장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이 맛.그것은 80년대 감성이자,우리네 인생의 맛이기도 하다.
사라져가는 노포(老鋪),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국물을 남김없이 비운 아들이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스마트폰과 숏폼 콘텐츠에 익숙한 아들에게,아빠의 젊은 날의 감성이 담긴 이 낡은 가게가 어떻게 비쳤을지 궁금하다.
"아들,어때?요즘 마라탕보다 맛있냐?"
"음.달라요.근데 따뜻해서 좋아요.할머니가 해준 것 같아요."
그거면 됐다.세대는 다르지만,'따뜻함'을 느끼는 감각은 유전되나 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다.주방에서 쉼 없이 움직이는 노부부의 허리가 조금 더 굽어 보이는 탓이다.재개발과 대형 자본의 홍수 속에서,이런 노포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우리 곁을 지키던 추억의 공간들이 '임대 문의' 종이 한 장으로 바뀌어갈 때마다,나의,그리고 우리의 추억 한 페이지가 뜯겨 나가는 기분이다.
창밖에는 여전히 찬 바람이 분다.하지만 뱃속은 든든하고 등 뒤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맛있게 드셨나?"고 묻는 할아버지 사장님의 인사에 진심을 담아 "정말 잘 먹었습니다.건강하세요"라고 답했다.
예비 고등학생이 된 아들의 앞날에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있을 것이다.공부에 지치고,친구 관계에 고민하고,때로는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아 좌절할 때도 있을 것이다.그때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먹은 이 뜨끈한 국물의 온기가,80년대 발라드 가사처럼 은은하게 아들의 마음을 데워주었으면 좋겠다.
사라져가는 것들은 늘 아쉽다.그래서 지금,이 순간의 한 그릇이 더욱 소중하다.삼송역 3번 출구,그곳에 가면 아직 '고향'이 끓고 있다.당신도 그 쓸쓸하던 골목을,그 뜨거운 국물을 기억하는가.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고양시 지역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며 우리 동네의 소소하지만 가치 있는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투박한 손맛이 담긴 노포와 사람 냄새 나는 골목 풍경을 사랑합니다.이 글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움츠러든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잠시나마 따뜻한 멸치 육수처럼 데워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