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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되는 이야기] 여성의 경험이 지워지는 방식에 대하여
A는 호인이었다.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그의 마음이 늘 느껴졌다.하지만 그와 만나는 자리가 거듭될수록 불편한 느낌이 강해졌다.심지어 머리가 아프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 혼자서 자리를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결국 나는 그와의 만남을 피하게 되었다.
직장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A는 유일한 남성이었다.그는 매번 본인이 원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끌어가려 했다.다른 이들의 공통된 주제로 이야기가 흘러가면 몇 번이고 자신이 관심을 가진 화제를 다시 꺼냈다.그리고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경우 그것을 무시하고 바라는 방향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씨, 〇〇〇라고 혹시 들어봤어요?”
어느 순간부터 A가 화제를 던지는 방식을 의식하게 되었다.대학원에서 차담이나 회식을 할 때면 듣던 남자 교수들의 말투가 떠올랐다.그리고 문득 깨달았다.이건 오랫동안 겪어온 전형적인‘맨스플레인’의 방식이라는 걸.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단어는‘Man’과‘Explain’의 합성어로,미국의 문화비평가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2008년 LA타임스에 기고한 에세이 「설명하는 남자들」(Men who explain things)을 통해 알려진 개념이다.솔닛은 여성이 이미 알고 있거나 심지어 그 분야의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여성의 지식과 경험을 무시한 채‘내가 더 많이 안다’는 전제하에 가르치듯 말하는 남성의 태도를 성차별의 구조적인 문제로 분석하였다.이제‘맨스플레인’은 여성이 겪는 언어 권력 문제를 설명하는 대표적 용어로 자리잡았다.
발화의 주도권과 성 역할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도 여성보다는 남성이 그런 식으로 화제를 꺼내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또,여성의 경우 상대방과의 정보 격차를 확인하기 위해 정말로 그걸 아는지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남성의 경우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발화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 같은 화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질문의 의도는 상대방의 대답에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보여준다.상대가 해당 정보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답해도,심지어 화제를 꺼낸 자신보다 그 분야에 박식한데도 상대의 대답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길게 설명하는 경우,정말로 궁금해서 꺼낸 질문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경우는 오히려 나은지도 모른다.상대방은 당연히 모를 거라는 전제로 가르치듯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도 많았다.한 환경단체의 시민모임에 갔을 때 조별로 주어진 논의 시간 15분을 당연한 듯 혼자서 쓰려 하던 남성.자신의 진료 과목을 넘어 인생에 대한 태도까지 긴 시간 훈계하던 의사.묻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가르치듯 늘어놓던 동갑내기 친구 등.
그런 구도에 물들어 있는 건,발화하는 남성들뿐만이 아니었다.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남자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수긍하는 역할에 익숙했다.심지어 내 문제에 대해 나보다 상대가 더 많은 말을 할 때도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고,서로 생각이 다를 때는 나의 판단을 검열했다.
저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했다.“‘맨스플레인’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말을 많이 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이런 일은 전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그는 여성도 남성을 가르치려 들곤 하지만,그 양상이 남성만큼 성 역할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거나 서열 관계의 문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맨 박스’에 갇힌 남성들
‘남자들은 자기 말만 하고 가르치려 든다’고 흉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우리의 무의식에 자리한 구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남자들이 왜 맨스플레인을 하게 되는가’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의 성 역할은‘사회적 권력’을 중요한 생존능력으로 취급한다.관계에서 권력적 우위를 점하려는 노력을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편으로서 습득한 것이 맨스플레인을 하는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거기에 더해‘여자들은 남자보다 실용적인 경험과 지식이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도 작용한다.
이렇게 남성이 화제의 주도권과 통제력을 더 많이 갖고,더 자주 더 길게 발언하고,여성의 말에 충실히 반응하지 않는 식의 권력 구도가 여성에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다.그러나,사실 이러한 젠더 위계 안에서 침묵하게 되는 것은 여성뿐만이 아니다.
트라우마 치료와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책 『진실과 회복』(김정아 역,북하우스,2024)에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의 심리학자 세드 데릭 힐이 또래상담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맨 박스(Man Box)’라는 의식고양 훈련을 소개한다.이 훈련에 참여한 젊은 남자들에게 힐 박사는‘남자’하면 떠오르는 것을 목록으로 작성해보라고 하는데,항상 똑같은 목록이 작성된다‘터프하다‘금욕적이다‘스포츠를 좋아한다‘고기를 먹는다‘많은 여자들과 섹스한다‘항상 책임자가 된다’등이며‘다정하다’는 목록에 없다.
그리고‘맨 박스’밖으로 나갔을 때 무슨 말을 들을 것 같은지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늘 똑같이‘암캐‘호모’등의 대답이 나온다.이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다른 남자들의 무시와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크게 자리해 있는지 알게 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은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능력을 갖추도록 사회화된다.여성은 대화에서 공감과 수용,경청과 배려를 우선시하도록 길들여지는 반면,이러한 정서적 돌봄을 능숙하게 수행하는 남성은 남성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충분히 남성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이는 곧‘취약함’으로 인식되고,개인에게 다양한 불이익을 감당케 한다.
불이익은 상대적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단절감을 겪는 등의 정서적 차원일 수도,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불이익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마찬가지로,자기주장이 뚜렷하고 타인의 입장을 우선시하지 않는 여성 역시 비슷한 부담을 지게 된다.
이와 관련해,심리학자 캐럴 길리건(Carol Gilligan)과 인권변호사 나오미 스나이더(Naomi Snider)가 함께 쓴 『가부장 무너뜨리기』에서는,가부장제가 소년에게‘배려 없는 권위’를,소녀에게‘자아 상실’을 내면화시킨다고 설명한다.또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구축되면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위로 치부”되며,“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감정과 지식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심리 기제가 가부장제를 유지시키는 원리”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벨 훅스(Bell Hooks)가 말했듯,가부장제가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폭력 행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다.가부장제는 먼저 모든 남자에게 자신의 감정적 부분을 잘라낼 것을 요구한다.
글 첫머리에 언급한 A의 모습을 떠올려본다.자신을 중심으로 화제를 이어갈 때 A는 신이 나 있었지만,끝없이 사람들의 동조와 인정을 갈구하는 듯한 그의 모습은 어딘지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맨스플레인에서 강간까지
맨스플레인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부장제의 권력 구조는 성폭력이 일어나는 원인이기도 하다.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지은 책 『보통의 경험』(이매진,2011)에서는 성폭력이 일어나는 사회구조적 원인에 대해 연구자들의 분석 결과를 소개한다.그중 첫 번째는 전통적인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이 성폭력을 낳는다는 분석이다.
그에 따르면 가부장제는 남성이 여성의 성을 지배함으로써 유지되고,이 장치가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 남성은 자신에게 이를 실현할 위협적인 힘이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성폭력은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이것을 확인시켜주는 일상적인‘길들이기’행동“이다.
그래서,맨스플레인은 단순히 무례하거나 불쾌한 대화 방식이 아니다.여성의 말을 끊고,믿지 않고,수정하며,결국 여성 스스로 자기 경험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상적 구조물이다.그리고 그런 구조는‘동의 없는 신체적 접촉’이라는 극단까지 정당화한다.즉,구조적 위계는 대화 속에도 깃들어 있으며,카지노 보상 무료 선물 2022그것이 여성의 목소리를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성폭력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 속 권력의 언어를 우리는 어떻게 마주하고 있을까?혹시 당신의 말하기 방식이 누구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의 말이 자꾸 끊기고,증명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 않으며,긴 설명으로 덮이는 상황이 반복된다면,우리는 거기에 깃든 권력 구조를 의심해야 한다.가해자만 바뀌는 사회가 아니라,그 가해가 가능해지는 관계 구도를 바꾸는 사회여야 하니까.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쓰면서 스스로도 놀란 점은,카지노 보상 무료 선물 2022처음에는 재미난 일화로 시작한 글이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을 이야기하면서 끝났다는 것이었다.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폭력으로 강요된 침묵,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그리고 우리가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리베카 솔닛,『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31-32쪽.
[필자 소개] 민바람.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퀴어,여성,신경다양성,빈곤,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퀴어 소설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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